성민은 ATTJ컴퍼니의 이사가 되기로 했고, 변호사는 그날부터 성민이 펀드 편을 들면 안 되는 순간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투자자 몫의 이사 자리 하나. 누가 앉을지보다 먼저, 그 자리에 앉으면 펀드가 아니라 회사를 위해 판단해야 한다는 규칙. 대리 출석이 안 되는 이유, 참관인이라는 자리, 그리고 이사를 지키는 서류 두 장
Jun Ventures 연대기 #10 · 읽기 약 5분
텀시트가 합의되고 투자 계약서를 쓰는 사이, 회사 쪽 변호사가 빈칸 하나를 채워 달라고 했습니다. 이사회 구성은 창업자 둘, Jun Ventures 하나, 나중에 뽑을 독립이사 하나. 그중 "Jun Ventures 하나"에 누구 이름을 넣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사회(Board of Directors)는 회사의 큰 결정을 하는 자리입니다. 대표를 뽑고 자르는 것, 큰돈을 쓰는 것, 회사를 파는 것이 여기서 정해집니다. 투자자가 이사 자리를 받을지, 받는다면 몇 자리인지는 정해진 답이 없고 라운드마다 협상으로 정해집니다. 투자 금액과 역할에 따라 참관인 자리만 받거나 아무 자리도 받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Jun Ventures는 이번 라운드의 리드 투자자로서 한 자리를 요청했고 창업자들이 받아들였지만, 누가 앉을지는 정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
후보는 셋이었습니다.
딜 스페시픽 벤처 파트너 현우는 이 회사를 찾아낸 사람이고, 서울에서 창업자와 가장 가깝고, 이 딜에서 나오는 수익의 일부를 받기로 되어 있습니다. 현우는 자기가 앉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펀드 전체 벤처 파트너 톰은 두 번 회사를 세우고 판 사람이라 이사회 경험이 가장 많았습니다. 톰은 자기가 앉겠다고 하지는 않았지만, 성민이 바쁠 때 대신 가 줄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민이 있었습니다. 첫 펀드의 첫 투자이고, LP들이 분기마다 읽을 보고서에 이 회사를 누가 챙기고 있는지 적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변호사의 설명
펀드 변호사는 세 후보를 고르기 전에 그 자리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했습니다.
이사가 되면 그 사람은 ATTJ컴퍼니와 ATTJ컴퍼니의 주주 전체를 위해 판단해야 합니다. 펀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것이 미국 회사법이 이사에게 지우는 의무(fiduciary duty)이고, 투자자가 보낸 이사라고 해서 예외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이해입니다. 평소에는 회사가 잘되는 것이 펀드에도 좋으니 문제가 없습니다. 문제는 두 이익이 갈라지는 순간입니다. 다음 투자를 받을 때 회사에는 높은 가격이 좋고 펀드에는 낮은 가격이 좋을 수 있고, 회사를 팔자는 제안이 왔을 때 회사에는 기다리는 것이 좋고 펀드에는 지금 파는 것이 좋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이사 자리에 앉은 사람은 회사 편에 서야 하고, 펀드 편을 들고 싶으면 그 안건에서 빠져야 합니다.
성민이 물었습니다. 그러면 펀드는 그 자리에서 무엇을 얻습니까. 변호사의 답은, 정보와 영향력이지 통제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먼저 알게 되고, 큰 결정에 의견을 낼 수 있습니다. 다만 펀드가 꼭 지켜야 하는 것, 예를 들어 회사가 새 주식을 발행하거나 회사를 팔 때 동의할 권리는 이사 자리가 아니라 투자 계약서의 별도 조항으로 받아 두는 것이고, 그것은 이미 텀시트에 들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설명은 톰의 제안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미국 회사의 이사는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 표를 던지게 할 수 없습니다. 성민이 못 가는 날 톰이 가면 톰은 손님으로 앉아 듣고 말할 수는 있어도 표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 자리와 별개로 참관인(Board Observer) 자리를 협상해 두는 투자자도 있습니다. 참관인은 회의에 들어가 듣고 말하지만 표가 없고, 표가 없으니 이사의 의무도 지지 않습니다. 이것도 회사가 받아들여야 생기는 자리입니다.
세 번째는 보호였습니다. 이사는 회사가 잘못되면 소송의 상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투자자가 보낸 이사를 위해 회사가 비용을 대신 물어 주는 면책 계약(Indemnification Agreement)과 임원 배상 책임 보험(D&O 보험)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호사는 이 둘을 투자가 끝나기 전에 갖추는 조건으로 넣자고 했고, 회사 쪽도 받아들였습니다.
성민의 결정
성민은 자기가 앉기로 했습니다. 현우는 서울에 있어서 회의 시간이 늘 새벽이거나 밤이고, 이 딜에서만 수익을 받는 사람이 회사 전체를 위해 판단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모양이 좋지 않다는 것이 변호사의 의견이었습니다. 대신 현우는 참관인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창업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회의실에 있는 것은 회사에도 펀드에도 도움이 될 것이었습니다. 톰은 성민이 못 가는 날 손님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현우는 서운해했고, 그 서운함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성민은 현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사 자리는 상이 아니라 의무이고, 그 의무는 펀드가 아니라 회사를 향한다. 당신이 이 회사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그 자리 밖에 더 많다.
서울의 기억
성민은 한국에서 심사역으로 일할 때 이사회 자리를 받은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성민이 있던 회사는 투자 계약서의 사전 동의 조항으로 회사를 지키고 이사회에는 참관인으로 들어가는 쪽이었고, 이사가 되면 책임이 따라온다는 것을 다들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에서도 이사 자리를 요구하는 투자자는 있었고, 그것은 회사마다 투자자마다 달랐습니다.
미국에서 달랐던 것은 자리를 받느냐가 아니라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습니다. 그 자리에 앉는 순간 자기 펀드가 아니라 회사를 위해 판단하겠다고 약속하는 셈이었습니다. 성민은 투자 계약서에 서명하는 날 서류 하나에 더 서명했습니다. ATTJ컴퍼니의 이사로서 회사가 성민을 보호하겠다는 면책 계약이었습니다. 그 서류의 당사자는 Jun Ventures가 아니라 전성민 개인이었습니다.
실제로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미국 시리즈 A에서 리드 투자자가 이사 지명권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지만, 받을지와 몇 석인지는 협상 사항이고 투자 규모나 회사의 협상력에 따라 참관인으로 정리되기도 합니다. 이사회 구성과 지명권은 보통 의결권 계약(Voting Agreement)에 적습니다. 델라웨어 회사법상 이사는 회사와 주주 전체에 대해 충실의무와 주의의무를 지고, 투자자가 지명한 이사도 같은 의무를 지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사는 대리인을 통해 의결할 수 없으므로, 참관인 권리는 투자자 권리 계약(Investors' Rights Agreement)이나 별도 서한으로 따로 정합니다. 투자자 지명 이사를 위한 면책 계약과 D&O 보험은 클로징 조건으로 요청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투자자가 기타비상무이사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고, 투자 계약의 사전 동의(동의권) 조항과 참관인 지명으로 갈음하는 경우도 있으며, 어느 쪽이든 회사와 투자자가 협상으로 정합니다. 이사로 들어가면 상법상 이사의 책임을 함께 진다는 점이 고려됩니다.
이 글의 용어
- 이사의 의무(Fiduciary Duty): 이사가 자기나 자기를 보낸 쪽이 아니라 회사와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 판단해야 한다는 법적 의무.
- 참관인(Board Observer): 이사회에 들어가 듣고 말할 수 있지만 표가 없는 사람. 표가 없으므로 이사의 의무도 지지 않습니다.
- D&O 보험(Directors and Officers Insurance): 이사와 임원이 업무와 관련해 배상 책임을 질 때 보험사가 대신 물어 주는 보험.
더 깊이 보려면
- 한국의 '대표이사' vs 미국의 'CEO/Board': 기업 지배구조의 근본적 차이 — 이사의 의무, 면책 계약, 스타트업 이사회 구성
- Term Sheet 핵심 조항과 Closing: Liquidation Preference에서 서명까지 — 이사회 구성 조항과 의결권 계약
다음 화는 실사를 회사 쪽에서 봅니다. 레이첼이 보낸 자료 요청 목록은 94개 항목이었고, 그중 두 개가 세 창업자를 1년 전에 서명한 서류와 지난봄에 받은 보고서 앞으로 다시 데려갑니다.
이 연재의 회사·펀드·인물은 가상이며, 실존 회사·인물·사건과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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